트럼프 통상정책의 마에스트로,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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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의 무역 갈등에 끝이 보이질 않는다. 높아지는 보복관세율과 함께 마치 베토벤의 ‘운명교향곡’을 연상케 하는 이 무역전쟁의 음조(音調) 역시 높아질 대로 높아져 이제 클라이맥스에 다다르고 있다. 지휘자는 무역대표부(USTR) 대표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대사다.

글_박정준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국제통상전략센터 선임연구원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자신의 보호무역적 기조에 완고한 입장을 보이며, 각종 무역협정의 참여 중단 및 재협상은 물론 WTO 탈퇴까지도 거침없이 언급했다. 시대착오적 무지함과 실현가능성 낮은 레토릭으로 치부된 그의 언사에 자유무역을 지지하는 많은 전문가는 방심했다. 그러나 그가 보인 자신감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는데 바로 그의 정책을 지지하고 진두지휘해줄 역대급 보좌진의 존재다. 그 중에서도 라이트하이저 대사는 핵심적인 인물이다.

자유무역과 보호무역의 상징이 함께 탄생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1947년 10월은 자유무역의 상징이자, WTO의 전신인 GATT가 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들을 중심으로 탄생하던 때다. 바로 같은 해 같은 달 11일, 보호무역의 상징적 인물인 라이트하이저 대표가 오하이오주 애슈터뷸라에서 태어났다. 트럼프 행정부 초기 그의 이름이 ‘라이티저’ 또는 ‘라이시저’로 오역된 적이 있지만 정식 이름은 로버트 에밋 라이트하이저(Robert Emmet Lighthizer)다. 의사였던 부친 오빌 제임스 라이트하이저와 모친 미셸린느 가르보 사이에 차남으로 태어났다. 부친과 이름이 같은 1살 터울 형도 변호사이자 정치인 경력을 가진 동시에 미국 남북전쟁(Civil War)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라이트하이저 대사가 무역전쟁에 조예가 깊으니 형제가 모두 변호사, 정치인인 동시에 전쟁이란 주제에 일가견이 있는 셈이다.

보호무역적 법률행위에 주력한 변호사 경력
애슈터뷸라에서 나고 자란 라이트하이저 대사는 사립학교 길모어 아카데미(Gilmour Academy)에서 수학하고 조지타운 대학교(Georgetown University)에 입학해 1969년 문리대 학부 졸업한 뒤, 1973년 같은 대학 법학 센터에서 법학박사(Juris Doctor) 학위를 받았다. 졸업 후엔 워싱턴 소재의 글로벌 로펌이자 로비력으로 명성 높은 커빙턴 앤 벌링(Covington & Burling LLP)에서 구성원 변호사(Associate Attorney)로 활동했다. 한 가지 재밌는 것은 그의 변호사 활동에서 우리나라 출신 전직 WTO 상소기구 위원들과의 인연이다. 장승화 전 위원 역시 커빙턴 앤 벌링에서 활동했으며 김현종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도 라이트하이저 대표가 39세이던 1985년부터 통상 전문의 파트너 변호사(Partner Attorney)로 몸담았던 스캐든 압스(Skadden, Arps, Slate, Meagher & Flom)에서 한솥밥을 먹은 추억이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라이트하이저를 2017년 1월 USTR 대표직에 지명할 때까지 스캐든 소속의 변호사로 일한 그는 30년 이상을 미국의 중공업, 농업, 첨단 기업 및 금융 기관들의 이익을 대변해 무역 소송이나 정책자문, 입법 활동에 힘써왔으며 특히 수입 제품에 대한 반덤핑 제소, 고율관세 부과 등 보호무역적 법률행위에 주력했다. 트럼프 행정부에 천거된 배경으로 볼 수 있다.

미국 주요 세재 개혁과 산업 보호의 주역
1978년 라이트하이저 당시 변호사는 커빙턴 앤 벌링을 떠났고, 대통령 선거에도 여러 차례 도전했던 미국 상원 재정위원회(US Senate Committee on Finance) 소속의 밥 돌(Bob Dole) 의원과 일하게 되어 비서실장(Chief of Staff)까지 오르는 등 큰 존재감을 보였다. 특히 재직 기간, 지난 수십 년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세제 개혁으로 평가받는 ‘1981년 경제회복세법(Economic Recovery Tax Act of 1981)’ 제정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담이지만 라이트하이저 대사는 농구 광팬으로 알려져 있는데, 과거 공직생활 중 격무에 시달리면서도 시즌 티켓을 소지했던 일이나 모교 농구팀인 조지타운 호야스 소속의 패트릭 유잉(Patrick Ewing)을 여름에 위원회 인턴으로 고용했던 것은 꽤나 유명한 일화다.
1983년에는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USTR 대표인 윌리엄 브로크(William Brock)를 도와 부대표(Deputy USTR)로 일하게 됐는데 철강, 자동차 및 농업 등 가릴 것 없이 미국의 주요 산업 보호를 위한 국제협상에서 맹활약했다. 1985년 9월 플라자 협정의 주역 중 한 명도 바로 그다. 그 외에 라이트하이저 부대표가 참여한 협상의 수만 해도 스무 개가 넘는데, 그 중에서도 일본과의 철강 무역 관련 협상은 지금도 두고두고 회자될 정도의 명장면이다. 일본과의 양자협상에서 상대의 제안에 대해 크게 관심도 흥미도 느끼지 못한 라이트하이저 당시 부대표는 노골적으로 일본 협상단을 업신여기는 제스처를 보임은 물론 교양 없고 거친 농담을 협상장에서 아끼지 않았다. 특히 일본 측 협상단의 제안을 담은 협상 문건이 마음에 들지 않자 종이비행기로 접어 다시 상대에게 날려 보낸 일은 믿기 힘들지만 실화다. 또 한 번은 일본의 발표를 듣는 둥 마는 둥 무시한 채 자신의 마이크를 분해하며 놀았던 일도 있다.     

대사(大事) 맡기 위해 돌아온 라이트하이저 대사(大使)
1985년 USTR 부대표직에서 내려온 라이트하이저 대사는 이후 트럼프 대통령의 신뢰와 지지 속에 USTR 대표로 화려하게 귀환했다. 대통령 직속의 정부기관 수장에 두 자녀를 키운 멋진 아버지 같지만 동시에 집에는 실물 크기의 자신의 초상화를 걸어 놓은 범상치 않은 인물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는 USTR에 돌아오기 직전까지 스캐든의 통상 전문 변호사로 수십 년간 경험과 경력을 축적해 이제 더욱 더 강력한 존재가 되었다. 심지어 지금도 므누신 재무장관이나 로스 상무장관을 향해 ‘미중관계는 헛소리(Bullshit)’라는 사자후를 내뱉는 데 거침없는 그는 분명 미국의 교역상대국들에게 공포의 대상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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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